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셸 드 몽테뉴 (문단 편집) ==== 내용 ==== ※ 『에세』는 죽음, 우정, 동물, 전쟁, 여행, 섹스, 취향 등등 여러가지 주제를 가진 1백 편이 넘는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단편들의 특징은, 특정 주제에 관련하여 자기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솔직하게 써내려간다는 점이다. 이를 '에세이'라고 부르는데, 이 에세이(essay) 양식을 제일 처음 쓴 사람이 바로 몽테뉴다. * '''우정''' 몽테뉴의 에세이 중 가장 유명한 글은 아무래도 〈우정에 대하여〉일 것이다. 이 에세이는 그와 가장 친했던 친구 라 보에시와 몽테뉴 자신과의 우정을 다룬 작품이다. 몽테뉴는 보르도 고등법원의 법관을 하면서 1558년 같은 법관인 라 보에시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리고 둘의 우정은 라 보에시가 죽은 1563년까지 5년간 지속되었다. 라 보에시는 1548년 보르도에서 소금세 부과에 반발하여 발생한 폭동과 그 진압 과정을 보고 충격을 받아 『자발적 예종론』이라는 논문을 썼다. 이 논문에 따르면, 인간은 관습과 이념으로 인해 의식이 무디어져 결국 폭군의 지배를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그는 곧이어 사람들의 결속과 소극적인 저항만으로도 폭군을 타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이런 주장을 당시 기득권층이 곱게 받아들였을리 없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널리 퍼지기도 전에 라 보에시는 패스트에 걸려 죽음을 맞이했다. 몽테뉴는 『에세』에 『자발적 예종론』를 넣으려고 했으나, 보르도 고등법원은 그 내용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그것을 태워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그는 친구의 논문 대신 소네트 몇 편을 골라서 집어넣었다. 그리고 몽테뉴는 라 보에시의 주장을 실으려 했던 부분에 원래 넣고자 했던 글을 뺐다는 표시로 별 모양의 부호 세 개를 집어넣었다. 그것은 회복할 수 없는 상실을 표현한 부호였다. * '''동물''' 몽테뉴는 더 후대의 [[데카르트]]와는 다르게 동물을 기계로 보지 않았다.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의사소통을 하며 우리는 단지 동물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말은 개가 짖는 소리를 듣고서 그 개가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경계하기도 하며 때론 어떤 소리에도 겁을 내지 않는다. 소리를 내지 않는 동물들도 서로 친밀감을 표시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또 다른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동물들은 동작으로 대화와 담론을 나눈다." 그리고 우리의 의사소통을 가로막고 있는 결함이, 어째서 그들만의 결점이며 우리의 결점은 될 수 없냐고 몽테뉴는 반문한다. 인간과 동물이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어느 쪽의 잘못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인간도 동물이 인간을 이해하는 정도밖에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동물을 야만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동물도 인간을 야만적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은 스스로를 신과 같은 자질이 있다고 생각하며, 야만적인 속성은 동물에게 돌리고 합리적인 이성은 인간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근거로 어리석음이 동물에게만 속하는 속성이라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 '''여행''' 몽테뉴는 여행을 유익한 수련이라 생각했다. 여행하면서 새로운 것, 알려지지 않은 것을 보게 되면 영혼을 지속적으로 단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몽테뉴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여행보다 더 훌륭한 학교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 학교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삶, 욕망, 관습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끝없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인간의 본성을 맛봄으로써, 살아가는 데 본받을 만한 것들을 배울 수 있다." 몽테뉴는 『에세』 초판을 발간하고 떠난 여행에서, 각 지역의 고유한 특색과 풍습들을 유심히 관찰한다. 독일에서는 정교한 시계가 많고, 이탈리아에서는 호랑이를 봤으며, 몽 스니 산에서는 썰매를 탔고, 이스니 지역에서는 현지 목사를 찾아가 신학에 관한 토론을 하기도 했다. 피사에서는 사제와 수도사들이 부유한 신도의 장례식을 서로 주관하려고 주먹다짐하는 것을 보았고, 로마에서는 사제가 퇴마의식을 통해 '마귀 들린 사람'을 다루는 장면을 목격했다. 몽테뉴는 여행이 "그곳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그 지방의 풍습과 예절을 따라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여행에서 프랑스 음식을 고집하지 않았고 각 지방마다 다른 먹거리와 식사 예절을 즐겼으며, 현지 관습에 따라 행동하고 어디서나 그 나라 방식대로 접대받았다. * '''죽음''' 몽테뉴가 살았던 시대는 폭력이 난무하던 때였다. 전쟁, 전염병, 결투, 처형 장면 등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만연한 죽음에 대해 몽테뉴가 취한 태도는 스토아주의처럼 죽음 앞에서 의연한 태도를 취하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에픽테토스]]가 말했듯이, 마치 항해 도중에 배가 어느 항구에 정박하여 물을 구하러 배에서 잠시 내렸을 때, 해변을 걷다가 조개나 고둥을 줍는 것과 같다. 그것을 줍다 보면 점점 재미가 생긴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배에 신경을 쓰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선장이 부르면 줍던 것을 모두 던져버리고 달려갈 수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인생에는 많은 것들이 주어지지만 결국 선장이 부르면 모든 것을 남겨두고 배로 달려가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말년에는 몽테뉴의 이런 스토아주의적인 생각들이 바뀐다. 그는 언제 죽을까, 어떻게 죽을까를 미리 생각하면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어봐야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생은 그 자체가 목표이자 목적이다. 죽음은 분명히 끝이지만, 인생의 목표는 아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 의연한 태도는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러므로 "행복하게 사는 것, 그것이 만족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 행복하게 죽는 것은 만족의 원천이 아니다." 이런 생각 끝에 몽테뉴는 마침내 이렇게 선언한다. "스토아학파는 가장 못된 패거리다." * '''회의주의''' 『에세』 가운데 특히 그의 회의주의를 잘 보여주는 글은 〈레이몽 스봉의 변호〉편이다. 아버지는 죽기 불과 며칠 전에 몽테뉴에게 에스파냐 신학자 레이몽 스봉[* 레이몽 스봉(Raymond Sebond; 1385 ~ 1436년): 스페인 출신의 스콜라학자. [[프랑스]] [[툴루즈]]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가르쳤던 흠정 교수. "세상은 신이 우리에게 준 거대한 책"이라는 『자연신학』이 사후에 출간(1484년)되어, 이후의 많은 자연철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후대의 [[갈릴레오 갈릴레이|갈릴레오]]도 "철학은 우리가 끊임없이 주목하는 이 거대한 책인 우주 속에 쓰여 있다. 그러나 그 책은 먼저 언어를 파악하고 그 언어를 구성하고 있는 문자를 독해하는 법을 배우지 않고는 이해될 수 없다. 그 책은 수학적 언어로 쓰여 있으며, 그 문자는 삼각형, 원 및 그 외 기하학적 도형들이다."라는 비슷한 얘기를 했을 정도이니, 그 영향력을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의 『자연신학』을 프랑스어로 번역해달라고 부탁했다. 몽테뉴는 아버지가 부탁한 대로 그 책을 번역했고 그 책이 아주 마음에 들어 설명을 곁들였다. 스봉은 신이 인간에게 두 가지 책을 주었다고 말한다. 한 가지는 성경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세계다. 그리고 인간은 이 '자연세계'라는 책에서 신의 존재에 대한 증거를 "읽을" 수 있다고 스봉은 주장했다. 그 "읽음"은 회의주의적 관점에서 비롯된 관용적인 자연탐구에서 시작된다. 몽테뉴는 스봉의 철학을 "나는 무엇을 아는가(Que sais Je)?"라는 한마디로 요약하고는 그 문구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 말을 새긴 메달을 만들 정도로 좋아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그 내용에 대해 비판을 해 와서 몽테뉴는 레이몽 스봉을 변호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작성된 에세이가 바로 〈레이몽 스봉의 변호〉이다. 몽테뉴는 이 에세이에서 고대 회의주의자들의 논변을 제시하며 "왜 우리가 사물의 본성을 이성으로 확신할 수 없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성으로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철저하게 무지할 따름이며 단지 끊임없는 탐구만을 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